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 프랑스 (문단 편집) === 프랑스 해방 === 여러 차례의 전과로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프랑스군의 대부분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상황이 반전되었는데, [[횃불 작전|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에 자극받은 독일군이 결국 비시 정부와의 협상으로 그간 마저 남겨두었던 남부 프랑스까지 점령하여 비시 정부를 괴뢰정권으로 만들자]], 애초 비시 정부의 출범 명분이였던 '프랑스의 자주 수호'가 사라진 만큼 비시 정부를 지지할 목적이 사라지게 되어 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점점 세를 키워나가고 자유 프랑스는 이들과 접촉해 국내에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전후를 준비하게 된다. 물론 상황이 자유 프랑스에게 팍 좋아진건 아니라서, 1944년 초 드골이 자기 측근을 프랑스 국내군 사령관으로 잠입시켜 [[레지스탕스]] 지휘체계 일원화를 시도했지만 그냥 무시당했다. [[좌익]]은 커녕 대다수 [[우익]] [[레지스탕스]]도 자유 프랑스의 지도를 거부하고, 연합군과의 연락창구 정도로 활용했다. 밑에도 나오지만 자유 프랑스가 레지스탕스를 지도했다는 건 후대에 윤색된 낭설이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70%는 좌익계였고 그중에서도 [[공산당]] 계열이 태반이었다.] 이후 [[알제리]] 등지에서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현지인 병력을 끌어모아 세력을 키우는 한편 [[노르망디 상륙작전|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작전]] 구상 당시 작전에 참여하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했다. 여기서 드디어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이후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하면서 드디어 수도 [[파리(프랑스)|파리]]가 가까워졌을 때,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전후 처리에 정치적 관심이 없어 전술적으로 큰 이득이 없는 파리를 굳이 탈환하기보다는 당장 독일로 진격할 것을 원해 연합군의 진격로에서 파리를 빼버렸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파리가 곧 프랑스였기 때문에 파리를 얻는 세력이 프랑스를 주도할 수 있었고, 실제로 프랑스를 냅두기로 [[필리프 페탱]]과 협의한 독일이 기어이 파리(를 포함한 북부 전반 지역)만큼은 자기 차지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였다. 따라서 프랑스의 정치적 세력들에게 있어 파리 탈환은 전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뭐가 어찌되든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고, 실제로 당시 프랑스에 존재했던 내로라하는 세력들은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보병대장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에게 각자 밀사를 파견해서 서로 자기 쪽한테 항복하라고 압박한다. 더군다나 [[아돌프 히틀러]]는 [[알프레트 요들]] 장군을 통해 콜티츠에게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해오면 도시를 '''초토화'''시키라고 명령한다. 이 와중에 항복을 권유하는 밀사들이 찾아오는 등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결국 고뇌하던 콜티츠 장군은 히틀러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자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허위보고를 한 후에 바로 가장 먼저 파리에 도달한 자유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그에게는 전쟁이 끝나자 재판에서도 가벼운 형을 받아 석방되고 파리 명예시민 자격이 주어졌으며, 훗날 파리의 구원자로 칭송받는다. [[대한민국]] 도덕 교과서에도 이 일화가 실렸다. 자유 프랑스 또한 마찬가지로 파리를 탈환하려 했고, 이에 자유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레지스탕스]]들에게 일제봉기를 사주해[* 사실 [[공산당]] 계열 [[레지스탕스]] 조직들이 먼저 봉기를 일으킬까봐 선수친 것도 있다.] 연합군의 진격로를 돌려놓은 뒤 드골의 명에 따라 연합군 사령부를 무시하고 육군 [[소장(계급)|소장]] [[필리프 르클레르|르클레르]](Philippe Leclerc de Hauteclocque)[*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주력 전차([[MBT]]) [[AMX-56 르클레르]]가 이 사람 이름을 딴 것이다.]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육군 제2기갑사단이 선두로 1944년 8월 25일 파리로 진격, 결국 치열한 정치암투과 비밀공작 끝에 콜티츠 장군은 파리주둔군 장병들의 신변 보장을 조건으로 자유 프랑스에 항복한다.[* 여기엔 당시 파리를 해방하려는 프랑스의 여러 무장 세력 중에서 '''제대로 된 정규군 편제와 규모를 가지고''' 파리로 진격해오는 세력은 '''자유프랑스가 유일'''했던 것도 콜티츠의 결정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게릴라 조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레지스탕스보단, 아예 기갑사단을 끌고 오는 자유 프랑스에게 항복하는 것이 부하들의 신변을 보장받는데 더 유리할 것은 당연했고 결정적으로, 레지스탕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공산계열 레지스탕스는 '''소련과 연결되어 있었다.'''] 런던에 머물러 있던 드골은 바로 비행기 타고 와서 자유 프랑스군과 함께 파리시에서 개선행진을 한다. 수십 만의 파리시민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영했고, [[듣보잡]]이던 드골 장군은 '구국의 영웅', '해방자' 드골로 프랑스인들에게 각인된다.[* 물론 그렇다고 드골이 이 자리를 날로 먹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서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를 자유 프랑스 지지로 돌리고 연합국을 설득해서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승자 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했~~고 다른 숟가락 얹으려는 작자들을 쫒아내고 연합국의 낙하산을 걷어차기도 했~~다. 자유 프랑스 조직 당시 드골은 고작 소장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파리 시민이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일 뿐이다.][* 오죽하면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 [[켈리의 영웅들]]을 보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미군들이 어쩌다보니 프랑스의 한 마을을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키게 되고 은행의 금괴를 털다가 주인공 일행을 따라오던 사단장과 엮이면 일이 꼬이게 되니 마을의 높으신 분에게 저 사람이 드골이고 여길 해방시켰다고 거짓말을 한다. 시민들도 라디오나 귀동냥으로 드골의 이름만 알 뿐 어떻게 생긴지 몰라서 지프차타고 오는 사단장을 드골로 착각하고 영웅으로 대접하며 환호한다. 한편 사단장은 자신을 환영하는 줄 알다가 드골의 이름을 부르자 드골놈은 후방에서 꿀이나 빨던 놈인데 자기랑 비교하냐며 화를 낸다. ] 결국 전후 좌-우 모든 정치세력이 결집한 임시정부는 드골 장군이 주도하게 된다. 이후에는 프랑스 남부에 [[미 육군]]과 함께 상륙한 프랑스 육군 제1군이 북상하면서 프랑스 대부분을 되찾고 레지스탕스 세력 및 감옥에서 풀려난 제3공화정 시기의 정치인들과 협력하여 드 골을 수반으로 하는 프랑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간신히 인정받게 된다. 드골이 본격 미국 까 정책을 취하게 된 원인이 이 때의 미국의 냉랭한 태도와 2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보인 태도, 그리고 이후 핵개발 과정에서 [[영국]] 및 [[캐나다]]와 손잡고 對프랑스 [[우라늄]] 수출을 막는 등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나토 지휘부를 탈퇴하는 강수까지 부리면서 미국에게 대항했고 핵무기 개발은 이스라엘과 협력하여 끝내 성공하게 된다. 자유 프랑스군의 군사력은 프랑스의 항복 직후인 1940년 7월에는 1만 명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으나, 이후 장악한 [[프랑스 식민제국|식민지]]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여기에 항복해 온 비시 프랑스군을 통합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45만여 명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 때문에 자유 프랑스 육군 병력의 30% 가량은 [[프랑스 식민제국|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본토 탈환 후 종전까지는 90만여 명의 대군이 되어 승전국의 말석 자리에 끼는데 성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